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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준] 이인제는 이회창의 트라이얼 버전인가?/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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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07 09:45:15 from 211.183 조회수 62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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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의 시계는 여전히 수리중
이인제는 이회창의 트라이얼 버전인가?
공희준 Cinema Jockey [confucius@hanmir.com]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수요일 오전 대선후보 경선출마를 공식 선언한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에게 딱 들어맞는 얘기다. 인물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국민들은 이전총재가 호화빌라 파동과 당내 분란으로 급격히 하락한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심기일전한 모습을 보여주길 고대해왔다. 하지만 출사표를 던지는 자리에서 이전총재가 국민을 향해 던진 메시지의 내용과 지향점은 회심의 역작은커녕 졸작 내지 범작이란 평가를 벗어나기 힘들다.
이전총재는 지지도 하락과 민심이반의 근본 원인을 아직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구 민정계로 둘러싸인 인의 장막에서 헤어나지 못한 인상이 짙다. 이전총재가 출마의 변으로 내세운 ‘좌파정권’ ‘급진세력’ 운운하는 레토릭은 80년대 민정당 대변인실의 노랫가락을 맴돌고 있다.
이전총재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외치는 정권교체 구호는 큰 반향을 울리지 못할 전망이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당을 제치고 원내 1당으로 부상한 한나라당 총재로서, 이전총재의 국정운영능력을 국민들은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집권 야당이라는 신조어를 세간에 유행시킬 정도로 이총재는 각종 게이트의 늪에 빠져 일찌감치 레임덕 상태를 맞이한 김대중 대통령보다 실질적으로 더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거대야당을 이끄는 제왕적 총재로서 이전총재가 보여준 정책노선과 정치철학은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넘어 절망감에 가까운 감정을 안겨줬다. 법인세 인하와 교원정년 연장 문제와 같은 구체적 각론에 있어 이전총재는 장기적 국익의 관점은 도외시한 채 특정 이익단체나 압력집단의 표심만을 의식하여 대다수 국민의 여망과는 동떨어진 정책과 입법작업을 무리하게 강행했다. 민족 전체의 절박한 생존과 직결된 남북문제에서는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통한 냉전구조 해체라는 겨레의 염원과 역사의 순리에는 아랑곳없이 냉전적 사고와 패러다임을 고집해왔다. 급기야 지난번 미국 방미시에는 미 행정부내 호전적 강경분자들의 장단에 놀아났다는 의혹마저 불러일으키며 뜻있는 이들의 이유 있는 공분을 자아내기까지 했다.
한나라당 지지도가 바닥을 기고 있는 현상의 뿌리를 캐어나가면 이전총재가 지닌 역사의식의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고 있다는 본질적 명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초침을 맞추거나 아예 시계를 바꿔차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일국의 지도자를 꿈꾸는 이가 가져야 할 방향감각일 것이다. 그러나 이전총재의 시침은 1980년대 어느 지점에 멈춰서 있고, 그 역사의식의 발걸음은 민정당 중앙당사 복도 언저리를 기웃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이전총재가 주장하는 정권교체의 귀결점은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다름 아니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낯익은 얼굴들의 면면을 둘러보면 전두환-노태우에 이은 민정당 3기체제 출범식이 진행중인 것은 아닌가하는 착각마저 불러 일으킬 정도이기에 하는 얘기다.
김대중 정권이 좌파정권이라는 소가 웃을 소리는 더 이상 하지 마시라. 박정희 기념관을 세우려는 삽질을 몰래 시작한 정권, 노동자에게는 쪽박과 곤봉세례를 선물하고 국내독점자본과 해외투기자본에게는 대박을 터뜨려준 정권, 소중한 그린벨트를 해제해 부재 지주들의 배를 불려준 정권이 급진세력이라면 대처나 레이건은 당장 때려잡아야 할 빨갱이의 수괴일 것이다. 이전총재의 현실독해능력은 금년이 정치입문 6년째임을 회고하는 본인의 소회처럼 여섯살짜리의 정신연령 수준에서 미운 일곱살짜리의 그것을 향해 부지런히 발전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전총재의 역사의식 빈곤과 정치적 색맹증상은 여러 사람들이 입이 부르트도록 지적해왔다. 이전총재에게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의 행보는 안타까움을 지나 답답할 정도로 더디면서도 그릇돼 있다. 시야를 좁혀서 대단히 미시적으로 따져 보자. 이총재는 이인제의 인정사정없이 망가지는 모습에서 뭔가 뜨끔한 구석이 없나. 노무현을 향해 퍼붓는 이인제의 독설과 ‘아니면 말고식’의 근거 없고 백해무익한 인신공격은 이총재가 노무현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되는 모든 소재와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이인제는 노무현의 면역력을 키워줄 백신인 동시에, 이총재에게는 정확한 탄착지점을 가늠할 수 있는 예광탄이다.
MBC가 4월 2일자로 발표한 여론조사를 통해 분명히 입증되었듯 노무현에 대한 이인제의 흠집내기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만을 초래해 그나마 남아 있던 이인제의 지지기반마저 제살 갂아먹기식으로 갉아먹고 있다.
이전총재는 이인제란 하늘이 내려준 귀중한 선물의 용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트라이얼 버전이 국민들에게 리콜대상으로 외면 받았다면 늦었더라도 신제품 개발에 착수해야하거늘, 왜 흥행에 참패한 고루한 신파극을 기를 쓰고 재탕삼탕에 더해 앵콜방송까지 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전총재나 이인제 고문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기로 하겠다. 대신 함량미달인 주변 참모들의 무능과 몰지각을 질타하련다. 대쪽 정치인에서 3金 정치의 부정적 유산만을 고스란히 계승한 구 정치인의 전형으로 추락한 이전총재는 파죽지세 노무현의 질풍노도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비새는 녹슨 창고에서 황급히 꺼내온 색바랜 빨간 벽돌로 부랴부랴 다시 쌓은 방파제가 민심에 힘입어 점점 높아지는 노무현 파고를 견뎌내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푸석푸석한 낡은 빨간 벽돌을 건네다주는 측근들의 손을 이총재는 하루 빨리 뿌리쳐야 한다. 기득권 세력의 적자이자 소위 주류세력의 적통임을 자임해 온 이전총재의 치열한 자기 부정이 전제되지 않는 한 대권쟁취는 한낱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구시대의 악습을 못버린 탐욕스런 측근들에 기대어 지탱되는 리더십은 모래성과 같다. 이전총재의 넓직한 가회동 빌라에 텔레비전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이전총재는 인기리에 방영된 MBC 드라마 ‘상도’의 악역 정치수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이전총재를 둘러싼 가신들이 정치수의 파멸을 재촉한 악독한 집사 장석주 같은 유형의 인물들이 아닌지 곰곰이 반성해야 마땅하다.
멀리갈 필요도 없다. 이인제를 보라. 과거 어디서 무엇을 배워왔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미운 짓만 골라하는 잘못된 공보특보 하나가 열명의 경쟁자보다 더 무서운 법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전총재는 비전 없는 집착의 수사학을 버리고 진정으로 포기의 미학을 실천해야 한다. 105평 빌라를 떠나는 것보다 천형처럼 이전총재의 대권가도를 가로막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정체성을 과감히 내던지는 일이 한결 시급하다. 주변을 에워싼 냉전세력의 인의 장막을 남김 없이 걷어내야 한다. 아울러 정치적 반대자에게 급진과 과격의 굴레를 덮어씌우는 퇴영적이고 비겁한 습성을 국물 한 방울 남김 없이 역사의 수채구멍에 버리기 바란다. 우리 민족사는 이총재가 쏟아낸 오수를 정화시킬 자정력이 충분히 있다. 수구냉전세력의 대명사인 민정계가 죽어야 이회창이 산다.
이전총재에게 이런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당부를 언제까지 오토리버스로 되풀이해야 하는지 답답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이제까지의 정황과 행태를 종합하건대 이전총재가 차고 있는 역사의 시계바늘이 앞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래도 백년하청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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