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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내 나이를 묻지 마세요, 내고향도 묻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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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야고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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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 시각 |
2002-04-07 12:09:49 from 211.244 조회수 227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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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를 묻지 마세요
삶의 전략이라든지 처세술이라든지 하는 것이 사람마다 있을 터이니, 내게도 그런 것이 있다. 이른바 ‘3불(三不)’ 원칙이다.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이다. 무엇을? 상대방의 고향과 나이 그리고 출신 학교를 묻지도 않거니와 나의 그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향·학벌·나이, 이 세 가지는 강력한 권력 네트워크가 되고 그것의 횡포는 자심함조차 넘어선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 세 항목을 조회하는 순간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금방 판독된다.”
일전 6명이 모인 환송식이 있었다. ‘담소’를 나누던 중 왕년의 ‘톱 씽거’ 나훈아와 남 진 중 누가 더 인기가 있었냐는 화제가 이야기의 한중간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데 그때부터 부드럽던 담소의 분위기에 짧은 파장의 긴장감이 돋고, 해서 어딘가 불편한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듯했다.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은 경상도, 둘은 전라도, 한 사람은 충청도. 경상도 쪽은 나훈아가, 전라도 쪽은 남 진이 우세했다고 주장하고, 중간 사람은 확실한 태도 표명이 없었지만 나훈아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 문제에 관한 한, 당시 <선데이 서울> 연예 담당 기자와도 일전을 겨룰 자신이 있다는 엄포와 함께, 나는 역사적 고증 및 수많은 사례를 들어가면서 자리를 정리했다. 지금은 남 진이 한참 꿀리지만, 1970년대 초에는 나훈아가 가슴 아프게 ‘넘버 투’였다고.
술자리 안주용에 지나지 않는 화제가 일순 그 자리를 은근히 불편하게 만든 까닭은 역시 출신 지역과 관련되기 때문이었다. 판사·박사·검사 등, 언론용 공식 용어로 하면 ‘사회 지도층’이 모인, 게다가 평소에는 온당한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에게서 그런 돌기가 ‘불쑥’ 올라오는 것이다. 경상도 출신인 내가 남 진 우세를 증거하지 않았다면, 모르긴 해도 그 자리는 아마 사실과 관계없이 나훈아 우세로 기울었을 터이다. 마치 우리 선거판처럼.
계급의 자리에 대신 앉아 있는 ‘학벌의 권능’
까마득한 옛날, 훈련소에 갔을 때이다. 초면인 훈련병들끼리의 흡연 시간. 그 때 한 친구의 말은 아직도 귓등을 기어다닌다. “야 너는 그러면 미팅은 어떻게 하냐?” 이른바 서울의 일류 대학에 다니다 온 그 친구는 옆의 친구가 지방의 무명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자 참으로 측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애도를 표시했다.
그 친구의 대뇌 표면에는 미팅도 대학 서열 순이라는 대한민국의 ‘게임의 법칙’이 깊이 불도장 찍혀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만이랴. 대한민국의 선량한 시민들은 출신 대학으로 사람의 높낮이와 운명을 규정하는 일이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예의 일류 대학 친구는 보통 사람의 보통 생각을 전형적으로 대리하고 있을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계급으로 사람 위의 사람과 사람 밑의 사람이 구분된다는 고전적 시각이 곧바로 적용되기 힘들다. 학벌의 권능이 계급의 자리에 대신 앉아 있기 때문이다. 이 학벌의 권능 그리고 학벌 동맹이 만들어 내는 놀라운 응고력과 연대성은 계급 모순 철폐를 외쳤던 학생운동권 출신에게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일류 대학 동창이라는 끈이 변혁운동의 논리로는 적이었던 상대를 순식간에 서로를 챙겨주는 우정 깊은 친구로 바꾸어 놓으니 말이다. 학생운동권 출신 국회의원 중 일류대 출신이 많은 것이나, 지방의 ‘마이너 리그’ 대학 운동권 출신들은 많은 경우 여전히 ‘마이너’ 인생을 살아가는 일, 이는 우연도 개인의 능력 탓만도 아니다. 학벌의 권능에 의해 갈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나이야 더 말해서 뭐하는가. 싸움 끝물에 ‘너 몇 살이나 먹었어’라고 엄엄히 호령하는 중년이나, ‘민증’(주민등록증) 까보자고 을러대는 청년이나, 후배들 ‘군기’ 잡는다고 설쳐대는 대학생들이나, 나아가 한 살 많은 이에게 말을 올려야 할지 내려야 하지 깊이 고심하는 한국의 보통 남자들 모두, 나이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는 우리 사회의 숙변이 여전히 강력 점착해 있다는 증거물들이 아닌가.
고향·학벌·나이, 이 세 가지는 강대한 권력 네트워크가 되고 그것의 횡포는 자심함조차 넘어선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 세 항목을 조회하는 순간 그 사람의 됨됨이, 수준, 능력 그리고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즉 서열 관계는 우리 머리 속에 내장되어 있는 자동 판독기에 의해 금방 판독된다. 무릇 기계에 입력되는 것은 숫자나 기호이지 사람 그 자체가 아니다. 예의 권력의 횡포도 두고 못보겠거니와, 내가 상대방에게 그런 기호가 아닌, 사람의 대접을 받기 위해서라도 상대방을 기호로 대접하면 안되겠다는 생각, 그것이 ‘3불’이라는 ‘기형의 원칙’을 만들어 놓는다.
이성욱(문학 평론가) dasan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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