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 진전의 역설
월드컵 4강을 계기로, 우리는 우리의 의식속에 스며있던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을 웬만큼은 씻을 수 있었다. 전세계는 한국을 부러워하고 있다. 세계인들은 거리에 나선 700만의 붉은악마를 부러워한다. 세계인들은 700만의 군중이 운집해도, 폭동으로 비화하지 않을 정도로 안정된 한국사회를 부러워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경제적 안정이다. 생각해 보라. 실업자들이 지천에 깔리고, 시민들이 사회에 대한 근원적 회의와 불만이 극에 달했을 때, 수 백만의 군중이 운집하는 경우를… 그런 경우는 유혈 혁명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경제 묵시록을 전파하고 있는 조선일보가 대규모 거리 응원에 우려를 표명했던 것은 이해가 간다.
나는, 최선진국의 일원으로 성장한 한국경제도 자랑스럽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이 더 자랑스럽다. 형식상으로 본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뚜렷한 흠결을 찾아보기 어렵다. 자유로운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이미 경험했고, 언론 자유는 현직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행위조차도 용인될 정도로, 과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불과 15년 전의 철권 군사통치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이 오늘과 같이 진전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우리국민은 이를 해 냈다. 수 많은 피와 땀으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켰다.
한국의 민주주의의 진전의 순역사적 사실에는 안타까운 역설도 포함하고 있다. 현재 ‘한국 민주화의 열매를 가장 많이 향유하는 집단이 반민주세력’이라는 역설…. 군사독재체제를 옹호했던 신문들이 언론자유를 넘어선 과도한 영향력으로 정치권력을 능가하는 현실, 군사독재체제의 잔존 세력들이 바로 그 신문들의 힘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할 수도 있다는 참담한 정치적 현실…. 이게 바로 한국 민주주의 진전의 역설이다. 왜 이렇게 정의가 왜곡되는 현실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것은 민주화과정에서 수구언론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들의 의도에 말려들어, 앵똘레랑스가 필요할 때 국민들이 이를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방후 일제 부역자들이 애국자로 돌변했던 왜곡된 역사처럼, 한국 민주주의 역사도 왜곡되고 있다.
민주화의 역설는 민주당 내부에서도 목격된다. 정당의 민주화가 진전되어 가장 큰 득을 보고 있는 집단이, 정당 민주화의 적이라는 기막힌 현실…. 민주당이 예전처럼 대통령후보가 공천권을 독점하고 있다면,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이 노무현 후보를 비난하고 공개적으로 비아냥대는 일이 가능할까? 민주화 되기 이전의 민주당이었다면,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당선이 정치적 손해로 귀결되는 ‘이해불일치 집단’이, 그 이해불일치를 행동으로 현시했을 경우, 당연히 출당이나 제명조치 됐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당내 민주주의의 진전은, 이를 용인할 수 밖에 없는, 역설을 연출하고 있다.
한국 민주화나 민주당 민주화의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국민들과 민주당원들의 손에 있다. 민주화의 역설을 막기 위해서는, 국민들과 당원들이 정확한 정보를 접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정보를 토대로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현명한 판단력을 구비해야 한다. 국민들과 민주당원들은 앵똘레랑스가 필요할 때는 앵똘레랑스를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화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학살자들과 그 동조자들의 반성 없는 용서’ 같은, 혐오스런 관용의 정신은 필요하지 않다. 이 혐오스런 관용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수구언론의 책동이 계속되는 한, 한국 민주주의의 역설적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민주주의 참으로 어렵다.
도통이/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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