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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05-30, 12:46:29 에 eesti 님이 작성하셨습니다. |
| 바보 같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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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마흔네 살의 ‘임아무개’씨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짧은 기사를 읽었다. 광주에서 살았던 그는 1980년 5월 21일, 집 옥상에서 시위를 구경하다가 당시 열 살이었던 남동생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한 뒤 줄곧 정신장애를 앓다가 결국 스물두 살에서 정지한 그의 삶을 마감했다. 당시 스무 살 꽃다운 나이였던 그의 여동생 역시 그때의 충격으로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지난 88년 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투신해 세상을 버렸다.
그 기사가 보도된 지난 18일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22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대통령의 삼남 홍걸씨가 알선 수재 혐의로 구속된 날이기도 했다. 서글픈 마음과 분노가 뒤섞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광주 항쟁 직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이가 아니었더라면, 독재의 광풍이 몰아치던 기나긴 시절 민주화와 정권교체의 상징으로 많은 국민과 양심세력의 변함 없는 지지를 받았던 이가 아니었더라면, 그 날 읽은 기사들이 그처럼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대통령이 고난의 시절 아비로서 자식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고 해서, 이번 비리 사건에 동정이 개입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의 아들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한, 그리고 그가 상징하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송두리째 전도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르몽드>를 창간한 붜브 메리가 말한 것처럼, '바보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해야 할 뿐이다.
송나라의 어떤 야인이 밭을 갈다가 구슬을 주웠다. 그 구슬을 사성(司城)인 자한(子罕)에게 갖다주었더니 자한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자한이 답하길, “자네에겐 이 구슬이 보물이겠지만 내겐 그것을 받지 않는 것이 보물이라네. 그러니 내가 그것을 받으면 자네나 나 둘 다 보물을 잃는 셈일세.” 다산이 전하는 이야기를 곱씹는다. 대통령의 아들과 그에게 돈을 건넨 이는 둘 다 “보물”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의 몰락에는 관심 없다. 우리의 보물이 따로 있기에 그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더욱이 그것이 5·18 항쟁 희생자들의 피로부터 빚진 것일진대, 아비의 권력을 배경 삼아 돈잔치를 벌인 형제들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잃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날이 오면”이라는 노래가 보험회사의 TV광고에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요사이, 그 노래를 숨죽여 부르던 이들이 고문과 투옥과 의문사로 스러져간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음을 되새긴다. 그때의 가해자들이 오늘 “비리 척결과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본다. 열 살 소년이 정치군인들의 총탄에 고꾸라져도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잊지 않는다”던 조선일보나, 전남도청 진압 하루 전날 “과감한 조치가 취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할 따름”이라던 중앙일보, 혹은 쿠데타와 학살의 주범들이 만든 민정당의 사생아, 한나라당의 손에 그 보물이 넘어가서는 안 될 이유는 그토록 분명하다.
대통령의 아들들이 정치 브로커들과 결탁해서 저지른 비리는 법적·도덕적으로 심판 받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파문에 편승하여 민주화 운동의 역사 자체를 욕보이거나 김대중 정권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를 왜곡하여 그를 물어뜯는 광증은 비열하고 악의적이다. 무엇보다 5월 항쟁의 씨앗이 맺은 결실이 다시 개들에게 던져지는 일을 막아야 하는 책임은 이 바보같은 진실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 5월 29일자 전교조 신문에 기고한 <시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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