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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06-26, 19:25:38 에 eesti 님이 작성하셨습니다. |
| 폭력이 잊혀지고 그래서 계속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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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한 가장 폭력적인 장면은 어두컴컴한 닭장차에서 헬멧으로 내 머리통을 후려치던 전경들의 모습에 있지 않다. 오른팔에 골절상을 입어 어깨까지 석고 붕대를 칭칭 감고 다니던 십수년 전의 어느 여름밤, 어깨동무를 한 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와 무차별적으로 발길질을 해대던 또래들이 내겐 폭력의 의미를 가장 잘 가르쳐준 사람들이다.
폭력이란 그러하다. 소수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곳에서 수적 물리적 우위에 있는 집단이 폭력화되기란 아주 쉬운 일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에게 저질러진 처참한 학살의 역사는 그렇게 설명될 수 있다. 19세기 호주의 태즈메이니아 섬을 점령한 영국인들이 “양을 방목할 공간을 얻기 위해” 원주민들을 전멸시키는 데 걸린 시간은 30년에 불과했다. 그들은 붙잡힌 원주민들을 재미로 산 채로 태우거나 부인에게 남편의 주검을 어깨에 둘러메게 하고 달리기를 시키는 등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근본적으로 의심케 하는 일들을 스스럼없이 저질렀다. 제국주의 침략사에 대해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직접적인 물리력의 행사가 폭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폭력의 세계는 더욱 폭력적이다. 헤아릴 수 없는 서부 영화들이 침략과 학살의 역사를 영웅적인 “개척”의 역사로 둔갑시킨 것은 현대의 폭력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서구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아우슈비츠와 베트남과 레바논과 보스니아를 참담한 수치심으로 끊임없이 되살려내어 그러한 역사인식을 오늘 행동의 강령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후 프랑스가 나치에 협력한 정치인들, 특히 언론인들에게 가혹하다할 만큼 준엄한 심판을 내린 이유는 무엇인가. 폭력과 그에 따른 희생의 역사가 기억되지 못하는 곳에서 역사는 반드시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치 정권의 <펠키셔 베오바흐터>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조선일보가 발행부수 1위를 차지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일제와 독재의 품에 안겨 글을 팔고 이름을 팔던 자들이 지금도 역사와 국민을 욕보이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얼마 전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은 명성황후의 처참한 죽음에 관한 숨겨진 진실을 보도한 바 있다. 기사는 명성황후가 일본인 낭인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산 채로 불에 태워졌음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 우익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분노하면서도,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에 -“경부선 철로를 깔아주지 않았는가!”- 공헌했다는 논리가 전혀 낯설지 않은 기만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깟 분노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그들의 폭력성이 인식되지 않고는 일제의 조선반도 “침략”은 일본 우익의 주장대로 여전히 “진출”일 뿐이다. 수탈과 대륙 침략을 위해 건설된 경부선 철로를 달리며 한 세기 전 조선의 근대화를 도와준 일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 우민들이 있는 한, 일본은 결코 조선을 침략한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폭력성을 인식하지 않고는 팔레스타인의 절망적인 저항은 언제까지나 무자비한 테러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폭력의 역사로부터 뼈저린 역사의식은커녕 일말의 반성도 얻지 못할 때 이 세계는 비관적이다.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의 망령을, 20년 가까이 폭력과 매판으로 이 땅을 더럽힌 그의 유령을 아직도 지옥에 처박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은 -“그는 경부고속도로를 깔지 않았는가!”- 참담하기 짝이 없다. 때문에 박정희의 “혁명재판소”에서 언론인 조용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이회창씨가, 오늘 언론자유 수호를 외치고 제1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현실은 더더욱 끔찍한 악몽일 뿐이다.
- <교육희망> 6월 26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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