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2001-12-27, 00:43:58 에 amharez 님이 작성하셨습니다. |
| 성탄절에 생각나는 사람, 문익환 목사님
|
활자를 통해서나마 문익환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입시공부에 여념이 없던 고3시절에 하이라이트 국어 참고서를 통해서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로 시작하는 서시를 설명해 놓은 페이지의 한쪽 구석에 윤동주의 어릴적 친구였던 문목사님의 짧은 회고담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요절한 시인 윤동주의 젊은 이미지와 노인네이자 학생들 데모나 선동하는 빨갱이로 인식되었던 문익환 목사님의 이미지로 인해 둘이 친구였다는 사실이 상당히 어색하게 다가왔었다. 물론 이후에 나의 인지가 커나가면서, 윤동주의 서시에 나타나고 있는 순수한 자의식의 세계와 문익환 목사님의 삶이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인을 꿈꿀 정도로 상당한 글재주와 감수성을 지니고 있던 문익환 목사님이 시인이 되기를 포기한 것은 너무나 훌륭한 시인 윤동주를 친구로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밤새 나름대로 열심히 쓴 시를 윤동주에게 보여주었다가, "이것도 시라고 썼냐"는 면박을 받고 시 쓰기를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님의 필력은 후에 대한민국의 신구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우리말 성경의 아름다운 문체로 피어났다. 비록 이 성경은 카톨릭에서만 사용하고 있지만, 개신교 신자인 나는 아름다운 우리말의 정수가 녹아있는 이 공동번역 성경을 무척 사랑하고 있다.
윤동주의 면박으로 시인이 되기를 포기하였던 문익환 목사님이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약 8년에 걸친 구약성서의 번역을 끝내고, 여느 사람 같으면 인생의 말년을 준비해 나가는 회갑을 바라보는 시점이었다. 목사님은 필생의 역작이었던 성서의 번역을 끝내고, 민중에게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하였던 구약성서 속의 주인공인 선지자들처럼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셨다. 문익환 목사님은 선지자의 삶을 번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소 실천을 해나가신 것이다. 그리고 이 선지자의 격정으로 목사님은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시적 열정을 펼쳐 보이셨다고 한다.
얼마 전, 문익환 목사님의 아들인 영화배우 문성근씨의 연설을 볼 기회가 있었다. 사자후를 토하던 문성근의 연설을 보면서 나는 살아 생전에 집회장소에서 선지자적 열정으로 연설을 하시던 문익환 목사님이 오버랩되었다. 마치 문익환 목사님이 살아 돌아와 이 민족을 위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듯이 보였다. 92년 대선에 실패하고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DJ가 94년 문익환 목사님의 영결식에서는 정말 대놓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상가집 울음은 자기 설움 반, 죽은 사람 설움 반이라더니 정계 은퇴 후의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웠기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생 민주화운동의 동지로서 문익환 목사님에게 느꼈을 DJ의 각별함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97년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잠시 문익환 목사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라는 생각을 하였었다. 아니 그보다 더 문 목사님이 보셨으면 했던 장면은 6.15공동선언을 일구어내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매진하셨고, 1989년에 몸소 가셨던 평양 시내 한복판에서 남과 북의 정부인사들이 모두 모여 '우리의 소원'을 부르던 모습을 보셨다면 문익환 목사님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셨을 것이다.
이제 아버님을 대신하여 그 아들이 역사의 분수령에 자리를 하고 있다. 문성근은 선지자 문익환이 다 못하고 떠난 이 땅의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노무현은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우리 시대가 고민했던 민주화운동의 종결점이자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있어서 그 점은 확실하다. 노무현은 2002년 우리가 선택해야할 유일한 대안이다(이미 다른 글에서 누차 이야기해서 더 이상 논증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순수하고 어린 마음을 가졌던 문익환 목사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의 아들이 하는 것처럼 분명히 노무현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남북의 통일을 위해 한 몸 아끼지 않으셨던 목사님이 동서의 민중이 군사독재의 간교한 계략에 의해 갈려진 꼴을 도저히 보고 넘기시진 못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신이 그렇게 소망하셨던 남북통일이 동서분열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히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문익환 목사님이 소천하시던 날, 북간도 용정의 광명중학교 동문이자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일권이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비교되는 두 사람이 같은 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조선일보는 정일권의 죽음을 크게 썼고, 한겨레는 문익환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크게 실었다. 평생을 양지만 좇아온 정일권의 삶과 민주화운동을 하신 목사님의 삶을 비교했을 때, 어찌보면 당연한 언론의 반응이었다. 당시 정일권은 대한민국 최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인 정인숙의 아들에게 친자확인소송을 당하는 피고였고, 문익환 목사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통일이 멀지 않았음을 내다보시며 통일운동을 하시던 시국 전과자였다. 또한 정일권은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인으로서 해방을 맞이하였고, 문익환 목사님은 일본 신학교에 다니다 일제 학병모집을 피하다 조국의 광복을 보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삶이 얼마나 비교되었으면 조선일보에서조차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칼럼이 실리기도 했다.
"대통령 말고는 다 해보았다는 정전총리는 양지에서 전무후무한 화려하고도 긴 관운과 로맨스를 남겼다. 한편 문목사는 9년반을 감옥에서 보냈고 6차례나 투옥되었으며 음지에서 고난과 역경의 한평생을 마쳤다. 중학교 동창인 두 분의 생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수많은 인걸 중에는 두 분과 비슷한 궤적을 가진 분은 없을까? 굳이 예를 든다면 같은 입장은 아니지만 성삼문과 신숙주를 들고 싶다. 두 분은 조선초기 학자요 정치가로서, 세종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공을 세운 분들이다. 신숙주는 세조의 왕위찬탈을 도와 6대 왕을 섬기며 부귀영화를 누린 분이며, 성삼문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해 사육신으로 생을 마감한 분이다. 역사의 인물들과 현재의 인물들을 되돌아보며 너무나 할 일이 많은 이 나라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 왔으며 어떤 인생관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 이 순간도 역사는 창조되고 있으니까"
노무현과 이인제, 노무현과 이회창의 삶 역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생을 양지를 좇아 살아온 삶과 평생을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삶에서 오는 감동과 여운의 차이를 ...
사실 성탄절에 생각나야 할 사람은 문익환 목사님이 아니라, 생일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다윗의 혈통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귀한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마굿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종교적 이해보다는 지배자의 정치적 이해 때문에 이루어진 사건이다. 예수님이 가까이 한 사람들은 계층적으로 소외받던 고아와 과부들, 지역적으로는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었다. 산상설교를 통해 엄청난 대중적 영향력을 가지게 된 예수님에 위기감을 느낀 지배계급은 그를 종교적 혐의를 걸고 반역자를 처벌하는 십자가형에 처한 것이다.
내가 노무현에 대해 반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삶이 그려온 궤적 때문이다. 노무현은 성공한 변호사로서의 생활이 가능했음에도 민주화운동과 노동자를 위한 변론활동을 해왔고, 정계입문 이후에는 영남출신으로서 안정적인 주류 정치인의 길을 마다하고 고난밖에 없는 호남당의 멍에를 자처해 왔다. 소신과 이해관계가 부딪칠 때 소신을 선택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 그에 대한 지지는 당연한 귀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기득권 세력들이 노무현에게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과 이회창의 맞대결이 명문 귀족과 이름 없는 서민의 대결로 펼쳐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 아닌가?
노무현은 얼마 전 출간한 책에서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링컨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이 고생만 하시다가 간 목사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짠하다. 목사님이 정권교체와 6.15공동선언만 보고 돌아가셨어도 내 마음이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문익환 목사님도 살아 생전에 정의가 승리하고 자신의 일이 성과를 거두는 것을 보았다면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내년 선거에서 이인제나 이회창 등 양지만 좇아간 사람들이 또다시 승리하는 것을 볼 자신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노골적인 노무현 지지의 글을 올리는 것은 거창한 역사를 위해서도 아니요, 노무현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냥 나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이다. 나는 내년에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보고 싶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에 문익환 목사님을 생각하며 빌어보는 나의 소망이다.
|
|
▶▷▶ 이 칼럼에 대한 짧은 의견들
|
|
Cyber Webz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