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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11-10, 23:56:28 에 eesti 님이 작성하셨습니다. |
| 김대중은 무슨 죄가 그리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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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송사의 게시판에서 김대중 정권을 "펭귄 일당"이라 표현한 글을 읽고,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지난 독재 시절의 상처가 묻어나는 노정치인에 대해 우리가 아직 다 갚지 못한 빚을 이렇게 쉽게 잊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의 걸음걸이가 희화화되는 것은, 백보양보해서 실패한 대통령에 대한 조소라 할지라도 독재 치하에서 목숨을 위협받으며 싸워나간 그의 투쟁이 싸구려 취급을 받는다는 느낌에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과연 전두환을 "대머리"로, 노태우를 "노가리"로 부르던 카타르시스와 그를 "펭귄"이라 부르는 것이 같은 값으로 매겨질 만한가.
모라토리움 일보직전의 국가가 대량해고라는 비극을 피해가며 IMF 관리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알고 싶다. 후손 몇 대까지 부담을 해야한다는 공적자금을 투입 않고도 국가경제의 짐이 되는 부실 금융기관 털어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그것은 해당 금융기관의 즉각적인 파산처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 백만원, 몇 천만원 짜리 서민들의 계좌까지 몽땅 날려버렸으면 지표상으로 나라 경제는 아주 좋아졌을 것이다. 그럴 수 없었다면 공적자금 운영 과정에서의 도덕적 해이를 비판하는 것과 대우와 한보철강으로 대표되는 수십 년 간의 왜곡된 경제 질서를 비판하는 것이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여야 하는가. 밍크 코트 한 벌을 둘러싼 거짓말 잔치와 수천억원의 뇌물을 받아챙긴 정권의 도덕성이 어떻게 동등하게 취급될 수 있는가.
생각을 달리 하는 분들이 아주 많을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소수정부라는 태생적 한계와, 전두환 노태우 사면과 박정희 기념관 건립이라는, 원칙을 포기한 지역감정 타파의 상징적 제스처들조차 정작 지역 구도의 완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릴 때, 노벨상 수상조차 "로비"에 의한 것이라는 노골적 적대감이 그의 앞에 드리워져 있는 현실을 목도할 때, 그래서 이제 인왕산 자락 노인네로 곤두박질쳐진 그를 떠올릴 때, 나는 이제 레임 덕, 아니 레임 "펭귄"의 처지가 된 그를 바라보며 희희낙락하는 이들 앞에서 그를 옹호하고 싶다.
그가 지은 죄가 과연 그리 큰가. 그의 의료개혁이 과연 의사들 배불리게 하려고 시작되었다고 믿는가. 의료개혁을 좌초시킨 세력이 누구였는가. FIFA에서 개고기 문제 삼는 게 그의 무능 탓인가, 미국 테러 사태 이후 재빨리 카우보이 부시에게 줄을 선 게 그의 신념 때문인가, 일본 러시아 중국이 차례로 우리나라 엿먹이는 것이 단순히 외교력의 문제인가. 그것은 일본 우익 교과서 채택률이 0.4%에 불과한 것이 우리 외교의 승리라고 믿는 것만큼이나 단순하고 유아적인 발상이다. 부시조차 근간을 흔들 수 없는 햇볕정책을 우리 외교력의 척도로 삼을 만한 균형 있는 시각은 지나친 기대인가. 마약 제조 유통 사범의 경우 자국민들에게 더더욱 혹독한 중국 정부의 정책을 뒤엎을 만한 외교력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는 소망은 약소국 백성된 죄로 더러운 꼴 많이 당하는 모두에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못난 소수정부에 단 한번 축복이라도 빌어준 이라면 이렇게 가혹할 수는 없다. 차라리 조선일보처럼 일본에서 우익 경제학자 데려다가 취임 초기부터 "김대중 정부 하의 한국은 IMF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악담을 늘어놓던 과거를 떳떳하게 생각하는 것이 정직하다. "빨갱이" "깽깽이" "펭귄"이라 그를 공격하는 것이 차라리 받아들이기엔 쉽다. 그의 정치인생 가운데 그가 그러한 덫으로부터 자유스러웠 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니까.
돌이켜, 김종필 이인제 이한동 같은 이들까지 재활용해야 했던 그의 "꼼수"를 비난할 때, 나는 그의 유약함과 비겁 그리고 동시에,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것조차 형편없는 소수정부로 출범시킬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한계를 동시에 읽고 싶다. 무능한 대통령 김대중을 보면서 나는 기나긴 독재의 시절 목숨을 내걸고 일관되게 투쟁해온 지사의 모습을 자꾸만 되살려 내려 한다.
민주당 총재직에서 물러난 그의 결정은 다수로부터 "항복"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예지"라는 평가를 받으며 이제 그는 다시 한번 역사와의 씨름에 나서고 있다. 그는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정치나 사람이나 삶의 모든 요인은 항상 살아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런 기본적 자세는 그를 매사에 원칙적이면서도 유연하게 만들었다. 이제 예전의 통찰은 많이 무디어진 듯하지만 어쩌면 1년 후의 대선에서, 그리고 먼 훗날의 역사가 그에게 승리자의 월계관을 씌워줄지 누가 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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