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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04-30, 14:01:20 에 eesti 님이 작성하셨습니다. |
| 개그맨과 대통령의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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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년쯤 된 것 같습니다. 주말 저녁의 TV 프로그램 중에, 개그맨 이홍렬이 선물을 들고 거리로 나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퀴즈'를 내고 정답을 맞추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떴다, 이홍렬!"이라는 꼭지가 있었죠. 기억하시나요? 하루는 그가 스웨덴인가 노르웨이에서 온 중년 남자를 마주쳤습니다. 이홍렬이 선물을 내보이며 손짓발짓으로 "Quiz"의 정답을 맞추면 품에 안은 선물을 주겠다고 하자 이 벽안의 남자는 다짜고짜 "Oh, thank you. I like cheese!"를 연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홍렬은 "No! Quiz, quiz!"를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그 남자의 대답은 요지부동, "Thank you. I love cheese very much." 였습니다.
문제는 "Quiz"의 발음이었죠. 굳이 한글로 적어야 한다면 "퀴즈"보다는 "크위즈"가 더 정확한 발음이었을 것인데, 그 외국인은 그 단어를 "취즈"로 알아들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배꼽 잡는, 그러나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해프닝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있었습니다.
정상회담을 앞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아마도 의전 비서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각하, 먼저 'How are you?' 하십시오. 그럼 클린턴이 'Fine, thanks. And you?' 라고 할겁니다. 그럼 그냥 'I'm fine, too.' 하시면 됩니다."
문제는 "How are you? (안녕하십니까?)"를 제대로 외우지 못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억력이었습니다. 그는 그만 클린턴에게 "Who are you? (누구시죠?)"라고 묻고 말았던 겁니다. 순간 당황했을 테지만 그 숱한 스캔들을 말재주로 피해간 클린턴은 역시 달랐습니다. 그는 재치를 발휘해서 "I'm Hillary's husband. (전 힐러리의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했죠. 물론 안타깝게도 그 말에 "I'm fine, too. (저도 잘 지냅니다.)" 라는 대답은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KBS의 어느 고참 아나운서가 쓴 책에 자세히 소개됩니다.
개그맨 이홍렬과 김영삼 전 대통령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아마도 전자는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 답답했을 테고 후자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탓에 마음이 편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요즘 들어 부쩍 심해진 우리 국민들의 영어에 대한 강박과 콤플렉스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요사이, 영어는 점잖게 말하면 경쟁력이고 극단적으로는 "잘리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문 종합 영어>를 바이블로 떠받들며 공부해온 세대에게 외국인을 만나서 입도 벙긋 못하는 현실은 거의 실존적 부조리입니다. 학교의 영어 수업은 의사소통능력의 배양을 지고의 목표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대기업에서는 2년 내에 사내의 공용어를 영어로 하겠다는 발표도 있었습니다. 늘 그러했듯 철학이 없는 편향과 유행이 태풍처럼 몰아치고 있습니다.
지난해,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영어는 점점 더 단순화하고 빈약해졌고 나아가서는 거의 파국적이라 할 만큼 왜곡되었다."라는 이단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영어가 "단순화"되었다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저는 -아마 위의 두 사람도- 속이 쓰릴 뿐입니다.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즈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국제적 영어는 기내식과 같다. 그것을 먹고 죽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아무도 그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한사전을 끼고 영어 소설 한 권 힘겹게 읽어내는 것보다는 "서바이벌 잉글리쉬"나마 훌륭하게 구사하는 것이 더 큰 미덕이 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영어권 소설가가 무얼 알겠습니까? 이 심각하고 절박하며 엄중한 현실을 미셸 투르니에와 줄리언 반즈는 알 턱이 없습니다.
그나저나 수학의 미적분을 못해도 사는 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때, 엄청난 인플레와 과잉 투자의 징후가 있는 영어에 대해 우리 사회가 그 정도 관대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류'로 편입되는 길이 멀고 험하게만 보이는 이들이 "나는 목욕을 했다."를 "I washed every body."라고 영작한 어느 중학교 2학년생의 실수에 그냥 배꼽이나 한번 잡으면 세계화 시대에 너무 태평스런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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