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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04-22, 23:31:28 에 icaruskj 님이 작성하셨습니다. |
| 어떤 세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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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린 시절의 많은 부분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보냈습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버지의 직장으로 인하여 우리 가족은 이
사를 자주 해야 했고 마침내 남도의 어느 곳까지 내려갔다고 합니다.
비록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고향을 묻는 다면 저는 가난한 사람들
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그곳을 고향삼아 답을 드리곤 합니다.
우리 가족은 포도밭을 끼고 무화과나무를 울타리로 삼은 집에 세를
들어 살았는데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저를 '포도집 애기'라 불렀습니다.
천천히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포도
며 감이며 잘익은 과일을 따는 것은 개구쟁이에게도 참 재미있는 소
일거리였습니다. 특히 탐스럽게 입을 벌리기 시작한 무화과는 별미일
뿐더러 수확하는 것에도 상당한 정성이 필요합니다. 그냥 무뚝뚝하게
땅에 떨어지도록 내버려두다가는 툭하고 터지기 쉽상입니다.
주인집 누나와 쉽지만은 않은 무화과 수확을 하던 날은 여지없이
소란스러워 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장 너머 이웃집 할머니께서
'왜 이렇게 시끄럽느냐' 부터 시작하시더니 마구 역정을 내시는 겁
니다. 자제분들은 멀리 어느 도시에 계신다는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
께서 어린 나이에도 그다지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을 가지고.
누나는 '이상한 할머니'라며 뾰룽퉁 하게 그 이야기를 하는데 아주
머니는 '연세가 지긋하시면 그렇게 되는 거란다. 너희가 이해하렴'
하며 슬며시 웃으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기 더 몇 해전 어느 설날이었습니다.
둘도 없던 단짝친구와 저는 여지없이 여기 저기 가까운 이웃 어
른께 세배를 하며 마을을 누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그 할머니댁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약간 머뭇거리다가 그냥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철없는 나이였지만 마을에서도 가장 어렵게 혼자 사시는 분인지라
행여 부담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할머니 난처하게
하면 안된다는 어머니들의 주의도 있으셨구요. 그런데 방안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왜 나에게는 세배를 않하려고 하니? 왜, 너희들
세배돈 못줄까봐? 어서와라, 아가, 핼미도 돈 있어" 세배를 마치고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정성껏 쌈지에서 50원 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내 작은 손에 꼬옥 쥐어 주셨습니다. "할머니 돈은 복돈이란다"
하시며.
동전일 지라도 손에 마음과 웃음이 한아름 가득 차면 되는 것을
왜 그리도 어렵게만 생각했을까요? 그 분이 가장 지혜로웠던 것 같
습니다. 자식들의 실수를 걱정하시는 젊은 부모님들 보다 더욱.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돈을 소중하게 간직하지 못한 것이 정말 아
쉽습니다. 돌이켜 보면 가장 값있는 세배돈이었는데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요?
세월이 지나 조금은 더 큰 읍내로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고 또 도
시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어른 흉내를 내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고 모처럼 반가운 마음으로 주인댁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허름했던 할머니의 집이 허물어지고 없는 것
입니다.
아주머니는 "응, 그 집 없어진지 꽤 오래되었다"하셨습니다.
그러다 문득 할머니의 정신이 흐려지시게 되고 난 후 역정을 내시
던 무화과를 따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세배를 오라고 하시던
정신이 맑으셨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 분은 '여기도 사람이 있단다.
그리고 나 외롭단다' 고 기척을 내셨던 것이었는데 …….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요?
허전하고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차마 그 분이 어떻게 되셨는지 여쭙지 못했습니다.
아마 아주 조금은 두려웠나 봅니다.
'왜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느냐' 고 부모님께 투정만
부릴줄 알았지 정작 그 외로운 할머니의 손주가 되어 드리지는 못
했습니다. 손주는 커녕 잠시의 말벗도 말입니다.
그렇게도 애처럽게 기척을 보내셨는데.
그때는 철없을 때였고 이제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이련만 또 다시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행여 바쁘고 피곤한
일상을 핑계로 모르는 척하는 속물이, 어릴 적 약속을 자꾸 어겨 가는
힘없는 어른이 되어 가는 것 같은 자신이 이제는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조금은 말입니다.
지옥은 몰라도 천국이라는 곳은 정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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