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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05-24, 15:27:28 에 불타는남자 님이 작성하셨습니다. |
| [기타] 혁명의 언론, 학살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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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터넷한겨레]
5월18일부터 27일까지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분수령 가운데 하나인 5.18광주항쟁을 기념하는 주간입니다. 전두환 당시 계엄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가 1980년 5월17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뒤 광주에서 벌였던 학살과 이에 대항한 시민 투쟁의 기간이 18일부터 시작하는 열흘입니다.
5.18은 총칼이 그 물리적 직접성으로 광기 어린 폭력의 극단을 비무장 민간인을 향해 연출했다는 점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잔혹극일 뿐만 아니라, 그 총칼이 강요하는 집단공포를 일심단결의 힘으로 물리치고, 선명한 정치적 슬로건을 내건 해방공동체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특별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5.18이 국가기념일이 되고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이 폭도의 누명을 벗었다고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그 이름은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매우 소극적인 명칭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잔인한 폭력에 수백 명의 생목숨이 찢겨 나가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그냥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5.18이 80년대 기나긴 반독재투쟁의 정신적 동력이자 도덕적 분노의 원천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의문은 더욱 커집니다. 그래서 5.18은 여전히 역사적으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5.18주간이 축제가 되지 못하고 우울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더구나 5.18의 진실과 의미를 한국 언론이 어떻게 왜곡하고 외면했는지를 생각하면 착잡한 마음이 더 짙어집니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재단 세미나실에서 열린 5.18 민중항쟁 21주기 기념 토론회'가 통상의 토론회와는 달리 블루 톤의 무거움 속에서 진행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날 토론의 주제는 `5.18광주민중항쟁과 언론보도'였습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과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 그리고 5.18민중항쟁 서울.경기동지회가 공동주최한 이 토론회는 5.18을 전후한 시기의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비교적 상세히 살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이날 토론회는 바로 앞서 열렸던 `안티조선 1인시위 정리집회'에 참여했던 분들이 다수 자리를 채웠기 때문에 후끈거리는 분위기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주제발표가 시작되고 얼마 안 돼 토론회장 안은 긴 침묵과 간간이 터지는 탄식으로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발제문에 담긴 내용의 무게 때문이었습니다. 5.18민중항쟁 서울.경기동지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임종일씨는 5.18당시 도청에서 싸웠던 시민군 출신입니다. 그의 발제문 서문을 이루는 몇몇 구절을 옮겨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의 거대언론들은 80년 5월의 `광주'를 작게는 5.18관련 당사자들의 문제, 조금 넓힌다 한들 광주와 전라도만의 문제로 한정지으려고 한다. 가해자들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반성과 사과가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거대언론들은 덮어놓고 화해와 화합을 말하곤 한다. 그러나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더욱이 이 나라의 거대언론들은 뻔뻔하게도 광주항쟁의 직접적인 가해자임을 망각하고 있다. 거대언론들은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서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독과점의 지위를 누리며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것은 광주항쟁에 대한 침묵의 대가였다. 그렇다면 언론도 광주항쟁의 가해자임에 틀림이 없다."
뒤를 잇는 글에서 임종일씨는 언론이 어떻게 가해자 노릇을 했는지를 차분히 밝히고 있습니다. 임씨는 언론 중에서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보도를 비교분석하고 있는데, 역시 눈에 띄는 것이 조선일보입니다.
조선일보의 군부에 대한 호의적, 편향적 보도는 광주학살에 대한 왜곡보도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동아, 중앙과는 확연히 다른 `화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임씨는 당시 조선일보의 보도 방향이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며, 5월17일치 기획특집 `흑백론시대'와 `요즘이 걱정스럽다'는 조향록 당시 한국신학대학장의 칼럼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이 칼럼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국민들은 어차피 나라를 정치인과 정당에게 맡겨야 할 터인데 생각하면 물가에 선 어린아기에게 맡기는 심정이니 크게 걱정스럽다. ...(중략)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고 적의 침략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군인이 아닌 승려인들 어찌 팔짱을 끼고 있을 것이며, 자기와 자기 처자식의 생명마저 노리는 자들에게 생리적 반항인들 안 보일 수 있겠는가."
조향록씨의 이 글은 민주주의의 도래를 축하하던 `서울의 봄'을 혼란기로 규정하면서 군인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발제자는 이 글이 "조선일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조향록씨가 대신 해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런 의심은 조향록씨가 몇 달 뒤 조선일보 발행인 방우영씨와 함께, 신군부가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입법위원으로 참여한 데서도 어느 정도 확인되는 일입니다.
이 글이 나간 그날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고 이튿날부터 학살극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군부의 보도통제 아래 있던 언론은 이 사건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중앙일간지들은 21일치 석간부터서야 겨우 이 광주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는데, 그마저 계엄사가 밝힌 내용만을 전했을 뿐 독자적 취재나 광주쪽의 의견은 전혀 싣지 않았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18일부터 23일치까지 사설을 싣지 않아 그나마 무언의 항의를 했지만 조선일보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만들기에 바빴음이 지면을 통해 확인된다고 발제자는 말합니다.
이를테면, 23일치 사회면에서 `폐허 같은 광주... 데모 6일째'라는 제목을 굵게 얹은 뒤에 측면에다는 `파출소, 방송국 불타' `자극적인 소문이 기폭제'라는 소제목을 뽑고, 25일치 사설에서는 `남파간첩들이 지역감정을 촉발시키는 등 갖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하면서, 이렇게 씁니다.
"(간첩들이) 민심을 흉흉케 함으로써 사태를 격화시켰으리라는 것도 십분 짐작이 가기도 한다. 피 흘림을 보고, 불길이 솟고 군중의 격앙된 심리상태에서 이성을 잃게 되면 냉철한 판단력이 요구되는 분별력이 없는 법이다. 57년 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
임종일씨는 "조선일보의 25일치 보도는 군부에게 무언가 명분을 주기 위함이 아닌가 할 정도로 광주를 폭도들에 의해 장악된 무법천지의 무정부상태로 몰아가고 있다"면서 또다른 기사로 사회면 머리를 차지한 김대중 당시 사회부장이 쓴 기명기사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바리케이드 너머 텅 빈 거리엔 불안감만.../무정부 상태 광주 1주'라는 제목 아래 `총 들고 서성이는 과격파들/길목서 저지...무기반납 지연' `시민들 생필품 동나 고통스럽다'는 소제목을 단 김대중 기자의 이 기사는 "쓰러진 전주 각목 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신문만 접한 독자라면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설치는데 진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기사였던 것이죠.
임씨의 발제문은 <전남매일> 기자들이 20일 제작을 거부하고 집단사표를 제출하면서 쓴 글을 옮겨 싣고 있는데, 이 짧은 성명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이 단말마와도 같은 성명에는 당시 광주와 언론의 진실이 응축.요약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주는 고립무원의 도시였고, 신군부의 학살극은 무차별로 진행되고 언론은 이를 묵인하고 방조했던 것입니다. 계엄군이 도청을 무력으로 진압한 다음날치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오직 명백한 것은 광주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안전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사태를 진정시킨 군의 어려웠던 사정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
이에 대해 임종일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선일보의 사설대로 군대는 온 국민의 아들이고 국민의 국군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광주시민들에게는 도저히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될 수 없었기에 `북괴'가 남파한 무장공비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의 화신으로 비칠 만큼 살상과 만행을 저질렀는데, 조선일보는 그런 군의 노고를 잊지 않겠단다."
5.18에 대한 언론의 침묵과 왜곡은 이후로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언론이 광주의 진실을 외면했기에, 김의기, 김종태, 홍기일, 송광열 등 수십명의 시민 학생 노동자들이 80년 5월의 광주를 죽음으로 알렸습니다.
마침내 85년 서울의 미문화원점거농성 사건이 벌어져 광주학살 문제가 전면화하자, 조선일보는 <월간조선>을 통해 관련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기사들의 내용은 계엄당국의 발표를 재확인해주는 수준에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광주'를 죽이고 말았다. 그후로도 `공수부대의 광주사태(88년 7월호) `전투는 있었지만 학살은 없었다'(96년 4월호) 등을 내보냈지만 제목에서부터 광주를 여전히 폭동으로 몰아붙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토론회가 진행되는 도중 제 머리를 맴도는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서울대 외교학과 최정운 교수가 99년에 펴낸 <오월의 사회과학>(풀빛)이란 책입니다. 광주민중항쟁의 성격과 실상을 파헤치고 `5.18담론'의 여러 층위를 면밀히 분석한 이 책은 5.18에 관한 가장 깊이 있고 짜임새 있는 연구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의 `이해사회학'이란 방법론에 기초해 사태를 분석하는 이 책은 공수부대의 만행을 `폭력극장'이란 개념으로 포착하고 그들에 맞선 광주시민들의 정서적 일체감을 `절대공동체'라는 개념에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고 올라오는 듯한 구절을 여러 곳에서 만났는데요, 그 중 몇 문단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아리랑은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효과를 가져왔다.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씨의 증언에 따르면 공용터미널 부근 어디에선가 군중들은 대자보를 읽고 있었다. `대자보를 읽고 있던 시민 중 누군가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노래가 아리랑으로 이어지자 울먹이기 시작한 시민들은 오열과 함께 통곡들을 거리에 쏟아놓기 시작하였다. 거리는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군은 3.8선으로 복귀하라!' `내 자식을 살려내라!' 통곡소리와 함께 구호가 거리를 뒤덮기 시작하자..."
"20일 밤을 통해 시민들은 허위방송을 일삼는 MBC에 방화하였고, 세무서와 KBS에도 불을 질렀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감정의 폭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방화에 관한 한 모든 곳에서 시민들은 찬반논쟁을 벌였고 논쟁의 결과에 따라 행동하였다. 또한 공동체에 의해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시민들은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드는 외에도 국가의 의식을 집행했다. 21일 새벽에 광주역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체는 대형 태극기로 덮었고 8시 시민들은 도청 앞에서 희생된 시민들을 위해 엄숙히 묵념을 올렸다. `짐승처럼' 맞아죽은 시민의 죽음은 이제 거룩한 희생이 되었고 이로써 그들의 부활은 기약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구절보다 더 제 마음에 다가왔던 것은 지은이 최 교수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쓴 `머리말'이었습니다. 70년대 유신폭압기에 제대로 저항을 하지 못했고, 80년 광주학살이 있던 중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자신을 돌아보며 고해성사를 보듯, 참회록을 집필하듯 쓴 장문의 글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5.18이 일어난 지 십수 년 동안 "그 어마어마한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학자연하고 살아왔다는 것은 개인적 수치였다"고 고백하면서, 한국정치학회의 압력에 밀려 덤터기를 쓰듯이 5.18 문제를 연구하게 됐지만 그 때문에 진실을 알게 돼 오히려 감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이 나온 뒤 최 교수는 저와 한 인터뷰에서 "5.18의 진실을 연구한다는 것은 광주 금남로 아스팔트 바닥을 혓바닥으로 쓸고 지나가는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라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의 학자가 단지 자신이 시대의 진실을 외면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런 수치와 고통을 느끼는데, 학살의 공범자였던 언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뻔뻔하게 활보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토론회 발제를 마치면서 임종일씨는 "서구에서 자유주의는 `언론을 무기로 하여 시민혁명을 성공시켰다'고 하는데, 우리의 언론은 권력과 야합하여 민주주의를 짓밟고 성장하였고, 국민의 피와 땀으로 얻어낸 언론의 자유를 누리며, 이제는 통제되지 않는 권력으로 자리잡고서 반민주적, 반민족적, 반통일적 행태를 일삼고 있다"고 일갈했습니다.
언론이 시민혁명의 무기가 되기는커녕, 권력탈취에 봉사하는 방패가 되고 시민저항을 무력화하는 진압도구가 되는 나라를 우리는 살아온 겁니다. 그런 땅에선 `자유민주주의'조차도 아직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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