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 31년)에 한반도의 근대화 선언이 있었다.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갑오경장이다. 이로 인해 한반도에서 전근대적인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다. 분명히, 제도적으로 신분제는 이 땅에서 폐지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전근대적인 세습 세력은 외세의 힘에 의해, 그리고 군사 독재 정권의 비호 아래 더욱 그 세력을 확장했다. 인간존엄성과 평등권을 표방하는 서구식 민주공화정의 정신과는 상관없이 이 나라의 공화정은 전근대적인 질서를 유지시키는 데에 혈안이 되었었다.
해방전에서 그 이후로 이어지는 세계사적인 근대화 과정 속에서도 이 나라의 봉건 세력은 '옷'만을 갈았입었을 뿐, 지속적으로 그 권력을 유지해 왔다. 형식적 제도 상에서는 '평등권'이 옹호되었으나, 기실 현실에서는 '기득권의 세습화'가 암암리에 이어져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이 나라의 삶의 현장에서 완전히 소거되지 않은 것이 바로, '반상' 관념이다. 제도적인 신분제는 사라진 지 100년을 지나고 있지만, 삶의 현실에서는 그 신분제적 편견이 다른 형태로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이 사회에 신분으로서의 양반과 상민은 없다. 하지만, 그에 맞먹는 '완곡한 신분제적 구조'가 확연히 이 사회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는 그 '완곡한 신분제적 구조'의 한 축을 '학벌'이라고 단정짓고 싶다. '학력'은 동서고금을 떠나 누구나 떠받들어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적 기회 균등을 가로 막는, 그리하여 한 인간의 삶 전체에 올가미로 작용하는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학력'을 평등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학력'이 소수 계층의 폐쇄적인 권력으로 돌변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커다란 잠재력이 '학력'이라는 데에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의 '학벌'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졌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나라의 '학벌'이 이 나라 최고의 대학을 세계 하위권으로 평가절하시킨 장본인 아닌가?
이와 함께 주목할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이 나라의 '실업계 교육'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과 편견이다. 이 현상에 대한 분석은 여러 가지로 나오고 있으나, 내 개인적인 관점은 '일그러진 공화정'이 아직 전근대적인 신분제적 편견을 완전히 말소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실업계 교육의 필요성은 자각되었으나, 실제, 삶의 밑바닥에서 '신분제'를 자발적으로 자생적으로 철폐하지 못한 이 나라는 '실업고 출신'은 곧 '상민(천민)'이라는 편견을 갖게 되었다. 분명, 이 사회에 상민은 사라졌으나, '상민이나 하는 일'이라는 전근대적인 사고는 존속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국민의 절반 가량이 거쳐가기 마련인 '실업계 고교' 출신들은 이 땅에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우리의 부모이며, 형 누나이고, 친구이며, 동생인 실업계 고교 출신들은 이 사회에서 '상민이나 하는 일'을 도맡게 되었다. 그와 함께 악랄한 편견을 껴안게 된다.
분명, 그 편견은 사회구조적인 것이지, 당사자(실업계 고교출신자)들의 몫이 아니다. 아직, 이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산업사회가 되지 않았으며, 그리고 합리적인 산업 인력 양성 교육에 실패한 것일 뿐이다. 일본과, 미국, 프랑스, 독일의 실업계 고교교육을 한번 눈 부비고 살펴보자. 그리고, 한참 계몽되지 못한 이 나라 사회에서 소외된 '실업계 고교생'을 살펴 보자.
그때, '악랄한 편견'이 '학벌'로 표상되는 이 나라의 일그러진 교육제도가 우리의 영혼을 갉아 먹고 있다는 사실의 예증임이 자명해질 것이다.
하루 빨리, 우리 계몽하자!, 아니, 이 나라를 개혁하자! 그리하여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신분제적 대한민국의 교육제도'를 끝장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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